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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의 사찰이야기166 - 삼연 김창흡이 세상을 등지고 찾아든 곳, 영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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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ELLO 작성일25-04-29 14:11 조회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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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시암(永矢庵)은 후불상조 설악산 등산로에서 기본 코스인 용대리에서 백담사를 지나서 내설악에 들면 만나는 암자이다. 영시암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세상에 뜻이 없어 찾아든 곳이라 한다. ‘길이 맹세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길 永’과 ‘화살 矢(명세하다)’의 ‘영시(永矢)’란 말에서 보듯이 그 당시에는 세속을 끊고 지내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영시암은 조선 중기 숙종 재위 시기에 지어진 암자이다. 이 시기는 서인과 동인,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절정에 달한 때이다. 숙종의 비(妃) 민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으며, 그 당시 임금의 총애를 받던 후궁 장소의(張昭義)가 아이를 낳았다. 후불상조 그래서 숙종은 그 아이를 세자로 삼을 계획이였지만, 서인이 반대가 심할 것이라 짐작하고 남인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막상 세자 책봉의 문제가 생기자 서인 송시열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유는 숙종의 나이가 29세이고, 민비의 나이는 23세이니 후궁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그러나 숙종은 서인들을 숙청하고 남인에게 주요 요직을 맡겼다. 이 때 영의정 김수항(金壽恒)도 사사(賜死)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 김수항의 아들 김창흡이 속세와 인연을 끊을 셈으로 내설악 수렴동계곡의 깊숙한 곳에 암자를 짓고 ‘길이 맹세 한다’는 뜻으로 영시(永矢)라는 이름을 후불상조 지었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1720(북면 백담로 1125)에 자리한 영시암은 백담사의 산내 암자이다. 연혁을 보면, 삼연 김창흡이 심원사 남쪽의 조원봉 아래에 정사를 창건했다. 그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부친이 숙청된 뒤로는 세상에 진출할 뜻이 없었고, 1705년(숙종 31) 모친상을 마치고 설악산으로 들어가 백담사에서 3년을 지내다가 1707년(숙종 33) 조원봉 남쪽 벽운사 옆에 벽운정사(碧雲精舍)를 지었다. 이후 건물에 불이 나자 서쪽으로 몇 리 더 깊숙한 곳에 정사를 다시 지어 머물렀다.
 
「삼연 김선생 영시암 유허지비(三淵金先生永矢庵遺墟之碑)」에 의하면 “기축( 1709)년 10월에 다시 절에 돌아왔다가 동쪽 후불상조 수리(數里)에 있는 조원봉 아래 북쪽에 판잣집 8칸을 짓고 영시암(永矢庵)이라고 이름했다”고 한다. 1714년(숙종 40)에 찬모(饌母)가 호랑이에게 물려 변을 당하자 춘천으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사찰은 그 뒤 폐허가 되었다.
 
풍악과인(楓嶽過人)이 지은 「영시암 개금 불사기(永矢庵 改金 佛事記)」에 의하면 옛 암자는 조운봉 아래 있었으나 이곳으로 옮겨지었다. 1760년 11월 7일에는 절에서 제일 오래되고 큰 석존불에 개금을 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 건봉사의 말사였으며 1925년 이기호가 영시암 주지로 부임하면서 절을 중수하였다.
 
6·25전쟁 시 전각들이 불에 타버린 것을 백담사 주지 설봉도윤이 1992년부터 후불상조 1994년까지 김창흡의 후손인 서예가 형제 김충현(金忠顯)과 김응현(金膺顯)의 후원을 받아 법당과 삼성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인의 주목을 받았던 설악산의 유명사찰로 조선 후기 유교,불교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영시암 전경.


범종루 - 불음(佛音)을 전하는 불전사물(佛前四物), 즉 목어, 운판, 법고, 범종을 안치해 놓은 건물로 단층의 건물에는 '범종각(梵鐘閣)'이라는 편액을, 2층(중층)으로 된 건물에는 '범종루(梵鐘樓)라는 편액이 주로 걸린다.

범종루는 허공계를 상징하고, 하늘의 천인들이 들려주는 주악소리, 즉 범천의 소리가 흘러 나오는 곳이므로 단층의 건물보다는 중층으로 된 루(樓)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법고로 땅에 사는 중생들을 구제하고, 운판으로 후불상조 공중에 사는 중생들을 구제하고, 목어로 물속에 사는 중생을 구제하면 육해공군 모두 구제하는 셈인데, 범종은 누구를 구제하는 의미로 쓰일까? 바로 지옥 중생 구제를 위해 친다.


정면 5칸, 측면 3칸에 공포는 다포식이고 팔작지붕을 한 비로전 모습.


영시암의 주법당인 비로전의 편액 글씨는 如初 金膺顯(여초 김응현, 1927 ~ 2007)선생의 필적이다.


주법당에 해당하는 비로전의 후불탱화에는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그리고 불단 위에도 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긴 하지만,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아미타불과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다. 앞쪽의 삼존불과 후불탱의 삼존불이 일치하지 않아 참배자들에게 많은 혼란이 있을 후불상조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연화장 세계(蓮華藏 世界)란 말 그대로,연꽃에서 출생한 세계, 또는 연꽃 속에 담겨있는(含藏,함장된) 세계라는 뜻으로 이상적인 불국토(佛國土)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로 연화장 세계의 교주이신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을모셔놓은 법당을 비로전이라고 한다.

부처가 설법한 진리가 태양 빛처럼 우주에 가득 비치는 것을 형상화 한 것이 비로자나불이다. 화엄신앙에서 비로자나 부처님은‘진리 그자체’를 뜻하는 법신불이기 때문에 형상화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7세기 무렵 중국에서 먼저 불상으로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 중반에 많이 모셔졌다.


이 건물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봉안하였고, 문수보살의 바깥쪽으로 지장보살님도 후불상조 함께 모신 인법당이다.


영시암(永矢庵) 편액 글씨도 비로전 편액을 쓴如初 金膺顯(여초 김응현, 1927 ~ 2007)선생의 필적이다.


영시암 편액이 걸려 있는 법당의 측면 모습.


토속신앙인산신,수명을 관장하는 칠성,독성을 함께 모신 전각을 삼성각이라고 한다. 이 세 분은 불교 고유신앙이라기 보다는 도교나 토착 민간신앙이 불교에 유입된 것이다.


근래에 새로 지은 요사채의 모습.

위에 기술한 내용 중에는 한국의 사찰(대한불교진흥원), 사찰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허균), 그리고Daum에서 배포한 자료 등의 내용을 참고하여 작성한 글이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 둔다.[사진 및 글 : 서백(徐白) 김춘식(金春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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